Journal Search Engine
Search Advanced Search Adode Reader(link)
Download PDF Export Citaion korean bibliography PMC previewer
ISSN : 1225-1011(Print)
ISSN : 2288-1727(Online)
The Journal of Fisheries Business Administration Vol.56 No.4 pp.81-105
DOI : https://doi.org/10.12939/FBA.2025.56.4.081

A Study on Refined Salt Production and Distribution in the Busan Area

Jin-Baek Kim*
*Professor, College of Business Administration, Tongmyong University, 428, Sinseon-Ro, Nam-Gu, Busan, 48520, Rep. of Korea
* Corresponding author : https://orcid.org/0000-0001-7386-2427, +82-51-629-1864, jinkim@tu.ac.kr
11/12/2025 ; 20/12/2025 ; 21/12/2025

Abstract


This study investigated the production and distribution of re-refined salt (Jaejeyeom) in the Busan area during the early 20th century. By analyzing salt import statistics and comparing the production costs of traditional boiled salt (Jayeom) with the retail prices of re-refined salt, the study identified the economic conditions that supported the growth of the re-refined salt industry. Large quantities of imported sun-dried salt entered through Busan Port. Although additional processing and distribution costs were involved, re-refined salt maintained a price advantage, helping it gradually overcome Koreans’ initial reluctance to adopt it. The distribution of Busan’s re-refined salt was primarily focused on Gyeongsang-do and Hamgyeong-do. In Gyeongsang-do, Nakdong river transport played key roles, with major distribution points including Hadan and Sangju along the Nakdong main stream, and nearby tributary regions such as Namji, Changnyeong, Hapcheon, and Milyang. After the opening of the Gyeongbu Railway in 1905, a large amount of salt was also transported to Daegu and Gimcheon via rail, though salt from Incheon also spread widely in northern Gyeongsangnam-do. In Hamgyeong-do, major distribution centers included Wonsan, Hamheung, Seongjin, Cheongjin, and Unggi. Despite producing salt locally, these regions lacked enough supply to meet both coastal and inland demand. Their locations along regular shipping routes made them key hubs for distributing Busan’s re-refined salt.



부산 지역의 재제염 생산 및 유통에 관한 연구

김진백*
*동명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초록


    I. 서 론

    1899년 편찬된동래부읍지에는 어전(漁箭), 염부(鹽釜), 선박 등1)이 동래부 지역에 다수 존재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사상과 사하 지역에는 낙동강 수운에 필요한 광선(廣船)이 각각 13척씩 기록되어 있어 이 지역을 기점으로 낙동강 상류 지역으로의 수운이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산 지역은 어염이 풍부하고 동해와 남해의 분기점 지역이며 낙동강과 인접하여 수운이나 해운을 통한 어염의 공급지 역할을 하였다.

    부산 지역의 소금 공급처로 대표적인 곳은 명지도(명호도) 염전이다. 명지도 염전은 설치 연도가 불명확하지만, 1819년 명지도 공염장이 폐지된 이후에도 영남의 대표적 소금 공급처 역할을 하였다. 구한 말에 발간된염업조사(1907)에는 “명지면의 염전 수는 총 37개이며, 염전 면적은 82.86정(町), 생산량은 37,287석(石)”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낙동강 연안의 소금 소비는 대개 명지 소금에 의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사행무역과 개시를 제외하고는 다른 무역이 없었다. 사행무역에서 소금이 교역된 기록은 없으나 개시에서는 소금 교역 기록이 있다.

    통문관지(通文館志)제3권 개시조에 의하면, 중강 개시와 회령 개시에서 각각 소금 310석과 855석을 조선에서 교역물품으로 제공한 기록이 있다(김진백 등, 2018, pp.142-8). 따라서 개항 무렵까지 조선에서 소금을 수입한 기록은 없다. 조선시대에 소금을 처음 수입하기 시작한 것은 개항 이후부터 이다. 1885~6년 2년간 연이은 홍수로 인해 전국 각지의 많은 염전이 유실되어 소금 생산 부족으로 인해 일본, 대만 등에서 소금이 수입되었다. 또한 구한말 부산항의 인구 증가와 어업 발달로 소금 수요가 증가한 것도 소금 수입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은 자연재해로 인한 소금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금 수입을 시작하였지만 소금 수입은 일시적 현상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수입 소금 중 청국과 대만의 천일염은 전통적 자염과 맛, 색상, 알갱이 크기 등에서 차이가 있어서 수입 천일염의 거부 문제가 심각하였다. 재제염은 천일염 거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일염을 가마솥에 넣어 재차 전오처리한 소금으로 천일염이 전통 자염을 대체하기까지의 과도기적 주요 소비 소금이었다.

    우리나라 재제염의 출발지는 부산 지역이다. 부산 지역에서 처음으로 재제염을 생산한 회사는 ‘한국대염판매합자회사(韓國臺鹽販賣合資會社)’와 ‘고이(許斐) 제염소’이다(유승훈, 2008, p.200). 한국대염판매합자회사는 1904년 10월 자본금 60,000엔으로 가타(賀田金郞) 등이 발기 설립한 회사로 대만의 전매국과 특약을 체결한 대가로 대만 천일염에 대해서 독점 판매권을 가졌다. 고이(許斐) 제염소는 고이(許斐友治郞)가 1904년 설립한 재제염 공장이다. 부산 지역의 재제염 생산 이후 인천 등에서도 재제염을 많이 생산 및 보급하였다.

    현재는 재제염이 소량 생산ㆍ소비되기 때문에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재제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어 재제염의 역사적 의미, 등장 및 유통 과정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여 이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20세기 초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탄생한 재제염의 생산 및 유통 과정을 그 탄생지인 부산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전통 자염 소비지역이 부산 지역 재제염의 소비 우위지역으로 전환된 곳을 밝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먼저 제2장에서 재제염의 탄생 계기가 된 수입염의 수입 추세를 살펴볼 것이다. 제3장에서는 조선의 자염시설이 회복되고 나서도 수입염을 이용한 재제염 생산이 지속된 주요 원인이 전통 자염과 재제염의 수익성 차이에 있음을 제시할 것이다. 제4장에서는 재제염의 공급 범위를 살펴보기 위해 물류수단별 유통 과정 및 지역을 살펴봄으로써 전통 자염 시장의 침해 지역을 간접적으로 밝힐 것이다.

    Ⅱ. 수입염 통계

    통상휘찬제167호에 의하면, 1878년 처음으로 일본염이 수입되었을 때는 수입량이 473표(俵) 정도였으나 해가 갈수록 조금씩 증가하였다. 이 당시 수입 일본염은 부산의 일본 거류민들을 대상으로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격적으로 일본염이 조선에 수입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일이다. 일본의 염수출 시작 단계인 1883~6년 시기2)에 조선에서는 대홍수로 염 부족 현상이 발생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염이 20세기 초까지 조선으로 많이 수입되었다. 1885~94년 부산항의 일본염 수입 추이를 살펴보면 <그림 1>과 같다(유승훈, 2007, pp.103-4). 1885~6년간 연이은 대홍수로 인한 조선의 염생산량 급감과 일본 내 염 과잉문제가 계기가 되어 1885년부터 일본염이 부산항을 통해 본격적으로 수입되었다.

    조선과 일본의 소금은 동일한 자염, 즉 전오염이지만 생산방식에서 차이가 있어서 조선의 자염 생산원가가 일본의 자염 생산원가보다 높았기 때문에 일본 수입염이 조선의 염시장을 파고들 수 있었다. 일본 자염의 생산원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주요 원인은 연료의 차이 때문이다. 즉, 조선은 송엽(松葉), 갈대 등을 주 연료로 이용하였으나 일본은 이 당시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였다. 부산 지역의 명지 염전의 경우, 갈대를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당시 전오염 1석 생산 연료비는 1원 15전 4리가 소요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석탄을 사용하여 소금 1석 생산 연료비가 송영(松永) 지역은 50전, 무양(撫養) 지역은 54전 6리, 미야(味野) 지역은 45전 4리, 흥원(興原) 지역은 28전 2리로 명지 염전의 연료비보다 훨씬 작았다(이영학, 1991). 이러한 생산원가 차이로 인해 1884년 이후 수입이 시작된 일본염은 점차 조선인에게 익숙함이 더해지면서 수입이 증가한 것이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1888~9년에는 부산항을 통한 소금 수입이 급감하였다. 이는 1900년 발행된 러시아 자료인한국지(한국정신문화원, 1984, pp.574-5)와통상휘찬(1899)148호에 동일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통계치의 누락이 아니고 실제 수입이 감소된 것임을 알 수 있다.통상휘찬148호의 부산7월상황에 의하면, 1899년에 기후가 좋아 염 생산액이 많아 염 가격이 떨어지자 소금 수입상인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따라서 1885~6년의 홍수로 소실된 조선의 염전들이 2~3년 뒤에는 거의 복구되어 조선의 소금 생산이 정상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1890년 이후부터 부산항을 통한 일본염 수입이 다시 급증하였으나 1894년에는 부산항의 일본염 수입이 또다시 급감하였다. 이는 당시 일본염이 대량으로 원산항으로 수입되어 부산으로 향하던 물량이 감소했기 때문이다(<표 2> 참조).

    1896~1903년 수입국별 소금 수입 추세를 비교하면 <표 1>과 같다. 1896년 이후 일본염의 조선 수출이 급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96년은 시바타 하지메(柴田一, 1966, pp.57-8)의 분류에 의하면, 일본의 염수출 급증기(1896~1903년)에 속한다. 따라서 일본염의 수출 급증기에는 조선의 일본염 수입 비중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20세기 들어서는 일본염보다 더 저렴한 대만과 청국의 천일염이 대량 수입됨에 따라 일본염 수입이 감소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소금 수입량은 수입국만 바뀌었을 뿐 꾸준히 증가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소금 수입 증가에는 소금 생산원가 차이 이외에도 조선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소금 수요 증가 현상의 배경에는 조선의 인구 증가도 한 몫을 하였다. 당시 조선의 인구 수는 1892년 6,634,291명이 1922년에는 17,208,139명으로 약 2.6배 증가3)하여 소금 소비량 역시 인구 증가에 따라서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생산원가가 낮은 외국산 소금 수입이 소금 생산원가가 높은 조선에서 증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소금 수입시기는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이영학, 1991). 제1기(1885~92년)는 일본염 수입의 시작 시기이며, 제2기(1893~1902년)는 일본염 수입의 급증 및 청국염 수입 시작 시기이며, 제3기(1903~10년)는 청국염 수입 급증 및 일본염 수입 급감 시기이다. <표 1>에 나타난 바와 같이 1903년 일본염의 수입 비중은 33.3%로 처음으로 과반에 미치지 못하였다. 1903년 이후 수입염의 주류는 청국염이 되었으며, 1907년까지는 일본염이 대만염보다는 조선에 많이 수입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대만염 수입량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조선말기 주요 소금 수입 항구는 부산, 원산, 인천, 진남포 등이었다. 따라서 남해안은 부산항, 동해안은 원산항, 서해안은 인천항과 진남포항을 중심으로 1885~1910년 동안의 수입염 통계를 항구별로 집계하면 <표 2>와 같다. 당시 소금은 부산항을 통해 가장 많이 수입되었다. 1885~1910년 동안 주요 항구별 소금 수입량에서 부산항이 다른 항구보다 적었던 연도는 몇 개년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1887년 원산항의 염수입량이 부산항 염수입량을 초과하였다. 이는 1886년 대홍수로 인해 원산 인근의 주요 염전인 영흥(永興)의 유도(柳島) 염전과 문천(文川)의 구산사(龜山社) 염전이 큰 피해를 입어 함경도 지역의 소금 공급에 큰 차질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886년부터 원산항을 통해 일본염 수입이 시작되어 다음 해인 1887년에는 더 많이 수입되었다. 1889년에는 소금의 수입총량이 급감한 해로, 이 해에는 부산항으로 159톤의 소금이 수입되었으나 원산항으로는 480톤이 수입되어 부산항보다 원산항의 수입염 수량이 많았지만, 1885~6년 홍수로 인해 파손된 염전이 정상화되어 소금 수입을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조선의 염생산량이 정상화된 이후인 1888년도에 수입되어 판매되지 못한 일본염 재고가 많았던 것도 1889년의 소금 수입량이 적은 이유이다(이영학, 1991).

    1904년과 1905년에는 부산항보다 진남포항을 통한 소금 수입이 더 많았다. 이는 <표 1>에 나타낸 바와 같이 당시에 일본염 수입보다 청국염 수입이 많아진 것이 원인이다. 청국염의 주요 산지인 산동반도 등과 가까운 진남포항으로 청국염 수입이 급증함에 따라 부산항으로의 일본염 수입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1906년에는 다시 부산항을 통한 일본염 수입이 급증하여 부산항의 수입염 비중이 40.0%를 차지하여 최대 소금 수입항이 되었다. 하지만 <표 1>에 나타낸 바와 같이 1903년부터 청국염이 일본염보다 더 많이 수입되었다. 또한 당시 소금 수입의 어두운 면을 알게 되면 실제로는 부산항이 최대 소금 수입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청국염의 밀수입이 많았다. 이들 청국 밀수염은 주로 산동성의 지부(芝罘), 등주(登州)와 위해위(威海衛) 지방에서 공급되었다(유승훈, 2008, p.191). 당시 서해안을 통한 청국염 밀수량은 정식 수입량에 맞먹는 양으로 실제 청국염의 총수입은 2배 이상 되었다. 일제는 당시 조선의 소금 소비량을 연 2백만 석으로 보고, 조선 자염이 150만 석, 해관 수입염이 25만 석이므로 나머지 25만 석을 밀수입염으로 추정하였다.

    탁지부의밀수입염상황조사에서는 서해 세관인 인천 해관, 진남포 해관, 신의주 해관을 통한 정식 염 수입량은 119,057석이며, 밀수입 염은 30만 석으로 정식 수입의 3배 가량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당시 일본염이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여 조선염보다는 생산원가가 낮았지만 천일제염을 하는 청국염이나 대만염보다는 생산원가가 높아 가격 경쟁력이 낮았다. 청국염의 수입 증가와 밀수입 측면을 고려하면, 1906년 이후에도 부산항을 통한 소금 수입보다는 인천, 진남포 등을 통한 소금 수입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1908~9년 부산항을 통한 소금 수입량보다 인천항 및 진남포항을 통한 소금 수입량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한 통계이다. 하지만 부산항의 소금 수입량이 1906년 이후 증가 추세를 보인 이유는 이 당시부터 재제염 생산을 위한 대만염 수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Ⅲ. 재제염과 전통 자염의 수익성 비교

    재제염은 인천부 주안면에 천일염전 건설이 시작된 1907년보다 앞서 도입되었다. 따라서 조선인은 조선에서 생산된 천일염보다 대만과 청국의 천일염을 먼저 경험하였다. 이로 인해 전통 자염과 색상, 형태, 맛에서 차이가 있는 수입 천일염에 대한 수용도는 낮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재제염은 조선인에게 천일염의 직접 판매가 어려워서 천일염의 대중화 이전에 과도기적으로 만들어진 가공염의 한 형태이다. 즉, 재제염은 단순한 신제품이 아니라 식민지 경제체제 하에서 값싼 천일염을 기존의 우리나라 식문화에 적응시키기 위한 전략적 시장 적응 과정에서 탄생한 ‘다리 역할’을 하는 기술적ㆍ문화적 산물로 볼 수 있다.

    가격은 주요 구매결정 요인이다. 따라서 재제염이 자염과 색상을 유사하게 만든 가공 천일염이라고 해도 가격이 비싸면 소비자의 수용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즉, 재제염의 가격경쟁력이 없다면 조선인의 재제염 수용도는 높지 않았을 것이다. 재제염은 천일염을 함수 혹은 담수에 용해해서 재가열을 통해 생산한 소금이다. 또한 원료인 수입 천일염은 수입 운송비가 생산원가에 포함되기 때문에 재제염은 조선과 일본의 자염에 비해 불리한 생산조건이다. 부산항으로 초기에 수입된 천일염은 대만산 천일염이다. 대만은 부산까지 7백 해리 이상으로 운임이 높은 편이다(유승훈, 2008, p.198). 수입염의 비용이 그나마 이전보다 절감된 것은 관세 부분이다. 당시 소금에 대한 조선 특례관세가 폐지되어 수입염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았다. 즉, 기존 소금 수입세는 천일염 100근당 10전, 가공염은 가격의 30%였으나 이 세금이 폐지되어 관세 부담이 없었다(조선전매사제3권, 1936, p.477).

    재제염과 자염의 판매 수익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1905년 자료를 기준으로 자염의 수지를 살펴보면 <표 3>과 같다. 1정(町)은 3,000평(약 9,917.4m2)으로, 1정(町)당 생산고가 가장 높은 지역은 부산 지역의 사하 및 명호(명지) 염전으로 1정(町) 면적 기준으로 소금 171,600근을 생산하였다. 판매수입 측면에서는 충청남도 거사리(巨沙里) 염전이 100근당 93.3전으로 가장 높았다. 그리고 생산비 측면에서는 일본인이 운영한 전라남도 고하도(高下島) 염전이 가장 작게 소요되었다. 이들 5개 지역의 평균을 보면, 소금 100근당 수입은 86.4전이며, 지출은 76.1전으로 차익이 100근당 10.3전에 불과하였다.

    1907년 자료에 나타난 전국의 자염 수지는 <표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05년 조사와 많은 차이를 보였다. 1907년은 이전보다 자염의 판매가와 생산비가 많이 상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자염의 전국 평균 판매가는 100근당 2원 9리였다. 반면에 자염의 전국 평균 생산비는 100근당 2원 16전 5리로 100근당 판매손실이 15전 6리로 나타났다. 불과 2년 사이에 자염의 가격과 생산비가 모두 많이 상승하였지만 상대적으로 비용상승률이 더 높아 판매 손실을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1907년 기준으로 100근당 소금 판매 수익을 거두는 지역은 함경남도의 문천군과 이원군, 함경북도의 명천군(해수직자), 전라남도 지도군, 전라북도 옥구군과 부안군, 경기도 인천군 등 7곳이었으며, 나머지 11곳은 판매 손실로 나타났다. 전반적으로 1907년에 1905년보다 손실 지역이 많은 이유는 값싼 수입염이 많아지면서 원가상승분을 판매가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도 원인일 수 있다. <표 1>에 나타낸 바와 같이 1907년은 전년보다 약 1,400만 근의 소금이 더 수입되었으며, 이후로도 염수입 증가 추세는 심화되었다.

    부산에서 시작된 재제염 생산은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원산, 경성(京城), 진남포, 청진(清津), 마산, 군산, 대구, 평양, 전주, 성진(城津), 목포 등에서도 재제염이 생산되었으며, 생산량도 점차 증가하여 한 해 생산량이 6천만 근을 넘기도 했다. 이러한 재제염의 수요 증가는 재제염의 가격경쟁력 때문이다. 대만염이 청국염으로 대체 수입된 이후 청국염을 이용한 부산지역의 재제염 수지는 <표 5>와 같다. 부산의 경우, 재제염 1,700근의 판매수입이 25원 50전이므로 100근당 판매수입은 1원 50전이다. 그리고 재제염의 생산원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주요 원료인 청국염 구입비이며, 다음으로는 석탄 구입비이다. 석탄 구입으로 나무, 갈대, 소나무잎 등을 이용하는 경우보다 연료비가 많이 절감되어 재제염 100근당 35전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수지 구조이다4).

    이상에서 살펴본 조선의 전통염인 자염과 재제염의 수지를 비교하면 <표 6>과 같다. 조사연도 차이는 있지만 소금의 생산방식과 지역에 따라서 생산원가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국 자염의 평균치를 보면 생산원가와 판매수입이 모두 가장 높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자염을 재제염보다 선호함을 알 수 있지만 생산비용이 많이 소요되어 수지 상태가 100근당 16전의 판매 손실을 보였다.

    하지만 부산지역 자염의 생산비와 판매가는 전국 자염의 평균보다 모두 낮지만 낙동강 하구의 풍부한 갈대로 인해 연료비가 적게 소요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용이 많지 않아 100근당 7전의 이익이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전국 자염의 자료보다 2년 앞선 1905년 자료로 수입과 비용의 직접적 비교는 어렵다. 부산 지역에서 청국염을 원료로 생산한 재제염은 자염보다 판매가를 낮게 설정해도 생산 비용 역시 석탄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적게 소요되어 100근당 판매이익이 35전으로 가장 높음을 알 수 있다. 즉, 재제염은 낮은 생산원가로 인하여 판매가를 낮게 책정하여 조선의 소비자에게 공급될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전통염인 자염 시장을 잠식하고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염산업을 파괴시킨 것이다.

    Ⅳ. 재제염 생산 및 유통 지역

    1. 재제염 생산 현황

    일제강점기 생산된 가공염은 분쇄염, 식탁염, 정제염, 재제염 등 네 종류이다(조선전매사제3권, 1936, p.333). 이중 재제염은 소금의 품질을 인위적으로 변화시킨 첫 번째 가공염으로서 의의가 있다. 재제염의 생산방식은 ‘분쇄’와 ‘전오(끓이기)’의 두 단계로 나뉜다. 분쇄 단계는 천일염을 증기식 분쇄기로 가루를 내는 작업이며, 분쇄로 인한 손실량은 미미하여 원염의 중량과 분쇄염의 중량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전오 단계는 가루 형태의 천일염을 해수 혹은 담수를 이용하여 염수로 만들고, 이를 끓여서 증류하는 단계로 통상 약 95%의 수율을 보인다(조선전매사제3권, 1936, p.470).부산방면상공업조사(1911)에 의하면, 전오용 솥은 다카다식(高田式), 이노우에식(井上式), 기타무라식(北村式) 등 3가지 종류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이들의 제작지역은 일본의 빙고쿠(備後國)5)이며, 가격은 다카다식이 대당 300엔, 기타무라식이 대당 250엔이었다. 재제염이 전통 자염의 대체염이 된 것은 자염의 성질을 살리고 천일염에 대한 거부감을 줄였기 때문이다. 재제염이 확산됨에 따라 부산 지역의 명지 염전 등은 큰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1922년 경상남도도세일반(pp.100-1)에 의하면, 당시 명지 염전이 속한 김해부의 자염 생산량은 1,403만 근인데 반하여 부산항의 재제염은 약 3,635만 근이 생산되었다.

    그리고 동래부에서는 자염과 재제염을 모두 생산하였지만 자염을 10배 정도 더 많은 65만여 근 생산하였다. 당시 부산항의 재제염 생산량은 경상남도 재제염 생산량의 89.9%, 금액으로는 86.2%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김해부의 자염 생산량은 경상남도 자염 생산량의 77.5%, 금액으로는 67.8%를 차지하여, 이들 두 지역은 경상남도에서 각각 재제염과 자염의 대표적 생산지였다. 경상남도 전체적으로 보면, 재제염은 약 4,044만 톤이 생산되어 자염 생산량인 1,811만여 근보다 2.23배 규모의 생산 실적을 보였다. 따라서 이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재제염이 도입된 이후 가격 등의 이유로 자염보다는 재제염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명지 자염의 주요 판매지역인 낙동강의 중ㆍ상류 지역은 부산항 재제염에 의해 많이 잠식되었을 것이다. 부산 지역의 재제염 월별 수요는 균일하지 않고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부산 지역 재제염의 성수기는 용도가 최종 소비용 혹은 산업용이냐에 따라 달랐다. 최종 소비용 재제염의 성수기는 봄과 가을 2개 시점으로 나뉜다. 봄철 재제염 성수기는 2~3월로 이 시기는 조선의 장담는 시기에 해당된다. 가을철 재제염 성수기는 9~11월로 조선의 김장 시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산업용으로 부산 재제염의 성수기는 5~6월이다. 이 시기에 부산 재제염의 수요가 많았던 이유는 고등어의 회유 시기와 관련이 있다.자산어보(2014, p.32)에 의하면, 고등어가 추자도에서는 5월에 낚시에 걸리기 시작하여 7월에 자취를 감추고, 8~9월에 다시 나타나며, 흑산도에서는 6월에 낚시에 걸기기 시작하여 9월에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수산과학원 자료6)에 의하면, 동쪽 남해인 부산 인근의 바다에서 욕지도 부근까지는 5~6월이 고등어 어획시기이다. 따라서 고등어 어획시기에는 고등어 염장용으로 부산의 재제염 수요가 많았다. 이러한 부산의 재제염 수요시기는재무휘보 1(1910)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1909년 부산항에서 식염의 최대 용도는 장제조용으로 소요량이 600천 근이다. 다음 순으로는 김장 및 가정용으로 2,200천 근, 어류 염장용으로 54천 근, 기타 용도로 486천 근 등의 순으로 식염 수요가 있었다. 비록 구체적 수요 시기는 특정하지 않았지만 재제염의 용도를 통해 수요시기가 2~3월, 5~6월, 9~11월 경임을 알 수 있다. 1911년에 발간된부산방면상공업조사에 의하면, 대만염판매합자회사가 대만 전매국으로부터 천일염을 지정받는 수량은 1908년 1,000만근, 1909년 1,500만 근, 1910년 1,000만 근이었다.

    재제염은 투입된 원염량의 손실이 거의 없이 생산되기 때문에 1908~1910년 동안 대만염판매합자회사가 생산한 재제염 생산량은 이들 수치와 동일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허비(許斐)제염소 등의 생산량을 제외한 수치이다. 따라서 1908~1910년 동안 부산지역의 재제염 생산량은 최소 1,000만근~1,500만 근 이상이었다. 1906년까지 2개에 불과하였던 부산부의 재제염 생산회사는 1909년에 3개, 1910년에 2개, 1912년에 1개가 설립되었다. 부산 지역의 재제염 회사는 허비제염소를 제외하면 모두 부산항의 절영도(영도)에 위치하였다. 1912년 이들이 생산한 연간 재제염의 수량은 18,960,000근이었다.

    부산부에서 1917년 발행한부산부세일반에 의하면, 1913~6년 제염업으로 등록된 부산의 제염공장 수는 8개에서 6개, 9개 등으로 변동하였다(<표 8> 참조).부산부세일반에서는 이들 공장을 재제염 업종이 아닌 제염업 업종으로 기록하였지만 1913년 업체수와 생산량이 각각 8개와 18,960,000근이므로 이는부산요람 부록(1912)에 기록된 재제염 생산업체 수와 생산량이 동일하다. 따라서부산부세일반의 제염업 공장은 모두 재제염 공장임을 알 수 있다.부산부세일반을 기준으로 보면, 당시 재제염의 생산량이 1916년에는 36,096,960근으로 1913년에 비해 3년 사이에 약 2배로 증가하였다. 또한 인천 재제염이 자염보다 가격이 100근당 25~30전 저렴하고 품질이 양호하여 여러 지방으로 판매가 확장 중이라는매일신보(1913년 3월 7일)기사도 있다. 따라서 이는 이 무렵부터 재제염의 낮은 가격, 전통 자염과의 유사한 맛 등으로 인해 조선인의 재제염 수요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전국, 경남, 부산부7)의 연도별 재제염 생산량을 비교하면 <표 9>와 같다. <표 9>에 나타낸 바와 같이 전국 재제염 생산량은 1923년(66,260,594근)이 가장 많았으며, 다음으로는 1931년(65,150,417근), 1927년(63,109,810근), 1930년(60,983,324근) 등의 순으로 많았다. 부산 지역을 포함한 경상남도 전체를 기준으로 재제염이 가장 많이 생산된 연도는 1927년(44,262,995근)이며, 그 다음으로는 1923년(42,192,057근), 1922년(40,436,238근) 등의 순으로 4천만 근 이상 생산되었다. 전국 및 경상남도의 재제염 생산량 변동은 거의 동일하다. 연도별 생산량의 증감(+, -) 기호를 보면, 1922년~1934년 동안에 1930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일하다. 이는 전국적으로 지역별 재제염 생산량이 비슷한 패턴으로 변동됨을 의미한다.

    <표 9>에 나타낸 바와 같이 재제염 생산에서 전국적 비중이 높은 경상남도의 경우, 내부적으로 보면 부산부의 생산량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부산부 재제염 생산량은 전국 생산량에 비교해도 평균 57.9%로 매우 높다. 이러한 전국 대비 부산부의 재제염 생산 비중은 1922~3년에는 62.2%와 57.2%였지만 1930년에는 54.2%로 하향 추세를 보였다. 하지만 경상남도 재제염 생산량에서 부산부의 재제염 생산량 비중은 반대 추세를 보였다. 즉, 1922~3년에는 경상남도 재제염 생산에서 부산부의 생산 비중이 89%대였지만 1930년대에는 92.9~94.7% 범위로 3~5% 정도 더 높았다. 이는 모든 지역의 재제염 생산량이 1920년대에서 1930년대로 오면서 감소하지만, 경상남도의 전체 감소보다는 부산부의 감소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아 그 비중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산부 재제염 생산은 20세기 전반기에 경상남도 내에서 절대적 비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재제염 생산에서 경상남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1922~1934년 동안 평균 62.9%로 높은 수준이다. 특히 재제염 생산에서 경상남도의 비중은 1920년대가 1930년대보다 높음을 알 수 있다. 전국 재제염 생산에서 경상남도의 재제염 생산 비중이 두 번째로 낮은 1934년의 각 도별 재제염 생산량은 <표 10>과 같다.경상남도 도세개람(1941)조선전매사제3권(1936)의 전국 재재염 생산량은 일치하지만 경상남도의 재재염 생산량은 두 문헌에서 100만여 근의 차이가 있지만 비율은 비슷하게 나타났다. 조선전매사를 기준으로 전국과 경상남도의 재제염 생산 설비 및 인원을 비교하면, 생산량의 과반 비중과는 달리 경상남도는 전국 재제염용 솥의 숫자에서 163개 중 64개로 39.3%를, 제조 인원 면에서는 65명 중 14명으로 21.5%를 차지하여 상대적으로 높지 않았다. 이렇게 경상남도는 재제염의 생산 시설대비 생산량이 많았지만 경기도와 평안남도는 반대 현상을 보였다. 경기도와 평안남도는 청국염의 주요 수입지역이다. 이로 인해매일신보(1913.7.5.)기사에 의하면, 당시 인천에서는 관동염과 산동염을 수입하여 15명의 사업자가 149개의 솥을 이용해서 전국 수요의 80%를 공급할 수 있는 79,583,177근의 재제염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1910년대 초반의 인천을 중심으로 한 서해 지역의 재제염 생산시설 상당수가 생산이 감소된 1930년대까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시설대비 재제염 생산량이 상대적으로 작은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부의 재제염 생산량 변동을 살펴보면 <그림 2>와 같다. 부산부의 재제염 생산시기는 착수기, 확대기, 쇠퇴기 등 3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부산부의 재제염 생산 착수기는 1908~1914년 간으로, 이 시기에는 1천만 근에서 약 2천만 근의 재제염을 생산한 시기였다. 부산부의 재제염 생산 확대기는 1915~1931년간으로, 부산부의 연평균 재제염 생산량은 34,833,811근이었다. 이 기간 중 부산부에서 가장 많이 재제염을 생산한 연도는 1927년으로, 약 4,100만 근의 재제염을 생산한 것으로 추산되며, 최소 생산 연도는 확대기의 첫해인 1915년으로, 21,604,400근이 생산되었다. 따라서 부산부의 재제염 생산 확대기의 최대 생산량 변동치는 약 1,935만 근이었다. 부산부의 재제염 생산 쇠퇴기는 1932~1939년간으로, 평균 재제염 생산량은 25,942,213근이었다. 이 기간 중 부산부의 최소 재제염 생산연도는 쇠퇴기의 첫해인 1932년으로 약 2,100만 근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다음 해인 1933년에는 부산부 재제염 생산량이 약 2,740만 근으로, 600만 근 이상 증가되었다. 이러한 일부 증가 추세는 쇠퇴기 전기간에 걸쳐서 유지가 되어 쇠퇴기 기간 중 가장 많이 재제염이 생산된 1937년의 생산량(28,171,500근)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후 기간에는 지속적으로 재제염 생산량이 축소되었다. 경상남도 도세개람(1954, p.112)에 의하면, 1954년 경상남도 전체 재제염 생산량이 90만 근이었으며, 자염 생산량은 2,666,667근으로 자염이 재제염보다 많이 생산되어 재제염 생산이 크게 쇠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39년 경상남도의 자염 생산량이 16,790,000근이었기 때문에 자염 생산량도 재제염 쇠퇴기 이후에 지속적으로 감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경상남도의 소금 생산량은 쇠퇴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감소되었으며, 이러한 지역 내 제염 감소로 인한 소금 부족분은 자체 생산이 아닌 다른 지역의 소금으로 대체되었다.

    2. 물류방법별 재제염 유통 지역

    조선시대 내륙 지역에 대한 소금 공급은 주로 하천에 의지하였으며, 이는 외국염과 내국염 유통이 모두 동일하다. 철도 개통 이후에는 철도 연변 및 그 인근의 소금 공급은 철도에 의존하였다. 1900년대 초 일본염 및 대만염의 수입항은 부산, 원산, 청호진(청진)8)이며, 수입염은 모두 그 인근 지방으로 공급되었다(한국수산지제1집, 1908, p.584). 따라서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 이후 도입된 부산부의 재제염 판매 지역들은 당시의 물류방법을 기준으로 보면, 수운 유통 지역(낙동강 연안), 철송 유통 지역(경부선 철도 연변), 해운 유통 지역(함경도 연안) 등 3개 유통 지역으로 나뉜다.

    1) 낙동강 연안 지역

    조선시대에는 육상 운송수단이 미발달하여 철도가 도입되기까지 수운과 해운을 중심으로 물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주요 유통경로는 물류경로와 동일하게 강과 해안을 따라 형성된 주요 포구간의 연결로 이루어지고 세부 유통경로는 주요 포구에서부터 인근 장시 간의 육로 연결로 형성되었다. 따라서 상업이 발달한 조선후기 이후 바다와 강은 유통의 대동맥 역할을 하였으며, 포구에서 인근 장시간의 육로는 유통의 모세혈관 역할을 하였다. 낙동강 하구의 명지 및 웅천의 소금은 품질이 양호하여 사방으로 유통되었으나 일본 수입염의 판로가 확대됨과 동시에 점차 유통지역이 위축되었다. 부산항 수입 일본염은 조선 상인을 통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내륙지방에 운송 및 판매되었다(통상휘집181호, 1900, 12). 즉, 부산 지역 염상인들이 가을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일본염을 판매하고 봄에 얼음이 녹으면 다시 그 배에 곡물을 싣고 낙동강을 내려오면 일본상인들이 곡물을 수입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경상도의 수운 유통 지역은 낙동강 본류와 지류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에 경상도는 전라도 다음으로 제염업이 발달된 지역으로, 경상도 해안 지역에는 많은 제염지가 분포되어 있었다. 특히 경상도 남해안의 곤양, 사천, 김해, 창원 등의 염세가 많아 이들 지역에서 제염업이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상도 동해안 지역에는 울산, 영일, 동래, 기장 등이 주요 제염지였다. 이들 경상도 제염지에 대한 균역청의 염세 징수액은 1891년 기준으로 4,049.58냥이었다(이영학, 2012). 경상도 주요 제염지의 낙동강 수운을 통한 염유통 지역은 경상도 서부 및 북부 지역이다.

    재제염이 기존의 자염 수요지를 중심으로 유통되었다고 가정하면, 자염의 유통 경로를 통해 그 유통 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 하단은 낙동강 하류에 속한 주요 포구로 수운과 해운의 접점에 위치한 포구이며 명지 소금의 유통 시발지이다. 하단을 출발한 염선은 상주의 낙동진 포구까지는 갈수기에도 운항이 가능하나 평수기에 비해 선적 가능량이 절반으로 줄어 소금의 유통 범위도 줄어든다(김재완, 1999, p.113). 하지만 낙동진보다 위쪽인 낙동강 상류지역(달지~안동)은 평수기에는 달지까지, 증수기에는 그보다 상류인 안동까지 강배의 소강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달지가 속한 문경 지역은 증수기와 평수기에만 하단에서 올라간 염선을 통한 소금 공급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보다 위쪽 지역인 안동은 증수기를 제외하고는 한강 수운을 통해서 서해안 소금을 공급받거나 육로를 통해서 울산 등의 동해안 소금을 공급받았으며, 그 규모는 안동 부근 염 수요량의 약 80%였다(김재완, 1999, p.118). 따라서 명지 자염은 19세기 말까지 낙동강 중류에 속하는 낙동진 포구 옆의 상주 인근까지 많이 유통되었으며, 그보다 상류 지역인 달지와 안동의 포구로는 유통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20세기 초의 부산부 재제염도 낙동강 상류 지역에서 이와 비슷한 유통 현상을 보였을 것이다.

    낙동강 상류 지역인 달지의 배후 대도시는 문경이므로, 이 지역으로 공급된 재제염은 문경 인근 5일장을 중심으로 부상(負商)을 통해 재제염이 판매되었을 것이다. 이는 당시 포구 객주와 염상과의 거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염상은 포구 객주로부터 소금 1섬을 받아 정기시장(5일장)으로 등짐, 우말짐[䭾運] 방식으로 운반하여 판매하였다(김재완, 1999, p.111). 즉, 당시에는 염상인 부상이 포구의 염 객주로부터 소금을 구매해서 최종 소비자에게 장시를 통해 소금을 유통하였다. 문경 혹은 달지 인근의 5일장으로는 문경의 읍내장ㆍ진남장ㆍ호남장ㆍ유곡장ㆍ가은장ㆍ농암장ㆍ송면장 등이 있으므로, 이들 장시는 달지의 염 객주를 통해 공급받은 부산부 재제염을 부상들이 유통한 장시이지만 가항일수를 고려할 때 공급량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낙동강 상류의 경상북도 북부 지역인 예천, 영천(영주), 풍기, 순흥 인근의 5일장으로는 안동의 편항장ㆍ옥동장, 예천의 읍내장ㆍ보통장ㆍ오천장ㆍ결운장, 풍기의 읍내장ㆍ전구장ㆍ영정장, 순흥의 읍내장ㆍ아곡장ㆍ감곡장 등이 있으므로, 20세기 초에 부산의 재제염이 이들 5일장을 중심으로 증수기에 일시적으로 공급되고 평수기와 갈수기에는 주로 서해 소금과 울산 자염이 공급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경상북도 북부 지역, 즉 낙동강 상류 인근 지역은 부산 재제염의 소량 수요처로 추정된다. 그리고 염 유통기구 기준의 낙동강 상류지역의 부산부 재제염 유통경로는 당시 ‘부산부 재제염 생산자 → 하단 염선상 → 포구 염객주 → 염상(부상) → 소비자’로 구성된다.

    낙동강 중류지역은 삼랑진에서 달지까지 구간이다. 낙동강 중류 지역에는 아래쪽 삼랑진의 배후도시인 밀양, 사문진의 배후도시인 대구ㆍ왜관, 낙동진의 배후도시인 상주 등 경상도 내륙의 대도시가 모두 속해 있다. 특히 왜관은 낙동강의 상류와 중류의 중간 지점이다. 이로 인해 왜관은 경부선 철도가 도입된 이후에도 김천, 대구, 경산 등과 함께 소금 도착량이 많은 역중 하나였다. 낙동강 수운을 통한 염유통에서도 왜관은 낙동강을 상ㆍ하행하는 배들의 종점으로 큰배에서 작은배로 화물을 환적하는 곳이었다. 즉, 낙동강 하류에서 온 염선중 비교적 규모가 큰 광선(廣船)의 소강 지점은 대체로 왜관이었으며, 왜관에서 하역된 소금은 소형의 평저선(平底船)으로 환적되어 상류로 운반되었다. 그리고 달지 바로 밑의 대도시인 상주는 낙동강 중상류의 대도시로 인근에는 낙동진, 신촌, 토진, 광대정 등의 포구가 있으며, 이 중 낙동진이 가장 큰 포구이다. 낙동진은 갈수기 기준으로 낙동강의 가항종점이라 갈수기에는 대선(大船)의 운항이 어려워 왜관에서 소선(小船)으로 환적하여 낙동진까지 염유통을 하였다. 또한 낙동진은 영남대로가 처음으로 낙동강을 도강하는 지역일 뿐만 아니라 의성 소로 및 선산 소로가 교차하는 교통요충지였다(김재완, 1999, pp.123-4). 따라서 낙동강 중류지역의 주요 포구를 중심으로 소금이 대량 하역되면 이를 소분하여 인근 소포구로 다시 수운한 후 혹은 주요 포구에서 직접 염상을 통해 인근 장시로 소금이 유통되었다. 낙동진 염객주는 염선상에게 1석당 100문의 구전을 받고 염상인 부상에게 소금을 이전시켰다(김재완, 1999, p.126). 이러한 소금 거래 관계는 20세기 초, 부산부 재제염의 낙동강 중류지역 유통에서도 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낙동강 중류지역에서도 부산부의 재제염 유통 경로는 상류지역에서와 같이 ‘부산부 재제염 생산자 → 하단 염선상 → 포구 염객주 → 염상(부상) → 소비자’로 구성된다.

    낙동강 하류지역은 하단에서 삼랑진까지 구간이다. 이 구간에서는 주로 남해안 염선들이 남해안염을 공급하였다. 그 이유는 이 구간은 수심이 깊어서 해선의 운항이 가능하며, 명지염보다는 남해안염이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지염은 하단에서 출발해서 낙동강 중ㆍ상류 지역으로 주로 공급되었다. 이로 인하여 하단은 명지의 대안(對岸)에 위치하여 연간 약 3만석의 소금이 집산된 큰 염집산 포구로 이는 마포의 37,500석 다음으로 소금의 집산이 많았다(김재완, 1999, p.167). 또한 하단 인근 포구인 구포는 감동창(甘同倉)이 존재하여 곡물 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지만 일본염의 수입 초기에는 일본염이 조선염으로 포대를 바꾸어서 낙동강 중ㆍ상류로 유통되던 곳이었다. 이렇게 조선의 전통 자염인 경우에는 남해안 자염이 명지 자염보다 가격이 저렴하여 낙동강 하류지역에 주로 유통되었지만 재제염보다는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재제염 등장 이후에는 남해안염의 낙동강 하류지역 유통이 어려웠다. 따라서 낙동강 하류의 김해, 양산, 밀양, 청도 등도 모두 부산부 재제염의 유통권이 되었을 것이다.

    낙동강 지류인 남강, 황강, 밀양강 등 다수가 하류지역에 있다. 이중 경상도 서남부 지역을 흐르는 남강은 남지에서 낙동강 본류에 합류한다. 이로 인해 남지로는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에 구포와 하단에서 소금 200석을 싣고 갔으며, 남지 옆의 영산 지역에는 읍내장, 남지장, 임해장 등 3개의 장시가 있어서 이를 통해 소금이 거래되었다(김재완, 1999, p.149). 남강의 가항수로는 평수기 기준으로 진주 낙동진까지이며, 갈수기 기준으로는 의령 인근의 정암진까지이다. 남강의 낙동강 합수점인 남지의 동쪽 지역인 영산과 창녕으로는 하단에서 소금이 매년 각각 2천석과 3천석 정도 수운되었다. 하지만 남강 본류에 속하는 남지의 서쪽 지역인 의령의 정암진으로는 하단에서 1907년 기준, 1,000석의 소금이 이입되면 의령에는 객주가 1명 있어서 이를 중개하였다. 남강 상류지역인 진주는 하천 조건이 좋지 않아 주로 육운으로 남해안의 사천, 곤양, 통영, 삼천포 등에서 소금을 공급받았다. 남강의 상류 인근인 단성, 산청, 함양, 안의, 거창, 삼가 등도 동일하게 남해안 소금을 육운을 통해 공급받았다. 따라서 남해안의 자염과 경쟁하였다면 부산부의 재제염이 가격이 염가라서 운송비가 비싼 육운을 하더라고 진주 인근 및 그 서부와 북부 지역으로도 공급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경상남도의 마산, 통영, 사천, 남해 등의 지역에도 재제염 공장이 있었다(유승훈, 2008, p.203). 이로 인해 남강 상류지역으로는 기존 남해안 자염의 육로 유통경로를 통해 남해안 재제염이 공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부산부 재제염은 남강의 갈수기 가항종점인 의령 인근의 정암진까지가 주요 유통경로였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남강의 수운 가능상태를 기준으로 보면, 남강의 중류인 의령,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지역인 남지와 동쪽의 영산, 창녕 등이 부산부 재제염의 주요 유통지역이었을 것이다. 낙동강의 또 다른 지류인 황강은 합천에서 낙동강 본류와 합수되며, 황강의 평수기 가항수로는 합천의 율곡면 영전까지이며, 밀양강에서는 밀양의 남포까지가 평수기 가항수로이다. 따라서 부산부 재제염이 황강과 밀양강으로 수운이 된다면 합천, 밀양 등도 그 유통권에 속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낙동강 지류 인근 지역에서도 의령의 객주를 통한 유통에서와 같이 객주가 재제염을 중개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낙동강 하류와 그 지류 지역에서도 부산부 재제염 유통경로는 ‘부산부 재제염 생산자 → 하단 염선상 → 포구 염객주 → 염상(부상) → 소비자’로 구성된다.

    낙동강은 상하로 길게 뻗은 강줄기와 좌우의 지류로 구성되어 경상도 수운의 근간이 되는 강이다. 이로 인해 경상도의 남북 중심선 인근으로는 낙동강 수운을 통해서 소금 유통이 이루어졌으며, 경상도 북동부 내륙지는 동해안과 동서로 연결된 육로를 통해 소금이 공급되거나 서해 소금이 남한강을 통해 수운된 다음에 문경새재를 통해 육운되어 공급되었다. 경상남도 서부 일부 지역은 남강의 수운 불편으로 인해 남강의 상류 지역들은 남해안 소금을 육운을 통해 공급받았다. 따라서 경상도 지역의 염 유통 지역은 크게 4개 권역으로 구분된다(김재완, 1999, p.173). 이들 중 가장 큰 경상도 지역의 염 유통권역은 낙동강 수운을 통한 낙동강 염 유통권이다. 이보다 작은 염 유통권역으로는 동해 연안에서 육운을 통해 소금을 공급한 동해안 염 유통권, 남해 연안에서 육운을 통해 소금을 공급한 남해안 염 유통권, 남한강 포구로 수운되어 다시 육운을 통해 소금을 공급한 한강 염 유통권 등이다.

    부산 지역도 낙동강 소금 유통권에 속한 지역이다.

    부산부 재제염은 부산부 내의 수요를 충족하고 남는 양은 낙동강 소금 유통권으로 보급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부산부 재제염이 낙동강 유역으로 수운되는 경우의 출발지는 하단 및 구포 지역이며, 중간 경유지 혹은 최종 유통지역은 삼랑진, 개포, 사문진, 무릉리, 매정, 낙동진, 왜관 등의 포구 및 배후 지역이다. 낙동강 지류중 남강 유역으로는 두 강의 합수지역인 남지와 갈수기 가항종점인 의령이 부산부 재제염의 유통가능 지역이다. 또 다른 낙동강 지류인 황강과 밀양강 유역에서는 합천과 밀양 지역이 부산부 재제염의 유통 가능지역이다. 그리고 염 유통기구 기준의 부산부 재제염의 수운 유통경로는 ‘부산부 재제염 생산자 → 하단 및 구포 염선상 → 포구 염객주 → 염상(부상) → 소비자’로 구성된다.

    2) 경부선 철도 연변 지역

    재제염이 생산되기 직전인 1905년에 경부선 철도가 개통9)됨에 따라 재제염은 경부선 철도를 통해 서도 유통되었다.부산방면상공업조사(1911, p.89)에 의하면, 부산부 재제염은 경부선 연변에서는 대구에서 김천까지 구간이 주요 유통지역이었다. 부산부 재제염이 경부선을 통해 김천까지만 유통된 이유는 인천에서 청국염으로 생산된 재제염이 경부선을 통해 밀양 지역까지 판매되었기 때문이다(<표 11>의 밀양 장시 인천염 판매 기록 참조).

    경부선 철도역 인근 유통 현황을 조선총독부 철도국의조선철도연선시장일반(1912년)을 통해 살펴보면 <표 11>과 같다. 출발지인 부산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소금이 유통된 곳은 구포역 및 구포 장시이다. 구포역에는 소금이 131톤 하역되고, 약 3배인 371톤이 상차되어 외부로 유출되었다. 구포역에 도착한 소금은 초량역에서 발송한 182톤의 일부일 것이며, 이는 구포 장시에서의 소금 거래와 연관이 있다. 구포 장시로는 김해염, 명지염, 전라도 염 등이 354톤이 이입되어 인근 지역으로 판매되었다. 예를 들면, 구포 지역은 낙동강 하구임으로 수심이 깊은 포구로 수운으로 대구, 김천으로 소금을 공급하였으며, 육운으로 인근 지역인 김해 및 하단(3리 거리), 부산 및 삼랑진(7리 거리)으로도 소금을 공급하 였다. 또한 물금역, 원동역, 삼랑진역 등으로는 소금이 철송된 기록이 없고, 1915년 조사한 수운 기록(조선하천조사서, 1929, pp.404-5.)에도 소금 수운 기록이 없어서 이들 지역으로는 구포에서 등짐, 우말짐을 통해 소금이 유통되었을 것이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명지염, 김해염, 일부 전라도 염이 구포포구로 유입되면, 포구 객주를 통해 다시 낙동강 상류지역으로 수운과 철송 등의 방법으로 대부분은 원거리 유통되었을 것이며, 소량이 인근 지역으로 등짐, 우말짐 형식으로 유통되었을 것이다.

    밀양역의 소금 도착량은 197톤이지만 밀양장에 유입된 소금은 이보다 훨씬 많은 7,913표(俵=석)이다.조선철도연선시장일반(1912년, p.47)에는 소금 1석을 150근10)으로 계산하므로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7,913석은 712여 톤으로, 이는 밀양역을 통해 공급된 소금보다 3.62배가 되며, 이 중 3/4은 인천에서 온 소금이다. 따라서 밀양 장시의 인천염은 상당수가 대구역을 통해 보내진 것이 수운을 통해 경남지역인 밀양 장시까지 유통되었을 것이다. 밀양 장시는 경상도 내 경부선 철도역 인근 장시 중 인천염의 최대 판매 장시이자 최남단 판매 장시이다. 청도역으로 소금이 792톤 도착하였으며, 이 중 일부는 인근의 청도 장시 및 풍각 장시로 부산의 소금이 공급되었으며, 창녕 장시로는 청도역에서 육운으로 혹은 부산에서 수운으로 소금이 공급되었다. 경산역은 이보다 많은 1,294톤의 소금이 인천과 부산에서 철송으로 공급되었다.

    많은 소금이 대구로 철송되었으며, 그 양은 2,116톤이다. 이들은 서문 장시와 동문 장시를 통해 인근 지역으로 공급되었다. 서문 장시에 공급된 소금은 인천염, 부산염, 청국염, 일본염 등으로 실제는 13,465석이 철송으로 공급되었지만 6,446석은 시장에 이입되지 않고 거래되었다. 대구역으로 철송된 소금은 주로 부산지역 소금으로, 부산역 출발 염이 6,825석, 구포역 출발 염이 2,275석으로 가장 많았으며, 다음으로는 평택역에서 출발한 염이 3,094석이었다. 그리고 서문 장시로 소량 소금을 공급한 역은 마산역(769석)과 인천역(682석)이었다. 따라서 대구역으로 철송된 소금 중 부산 지역 소금이 67.6% 를 차지하였다. 서문 장시에 이입된 7,200석 소금은 주로 우마, 등짐, 사문진 수운을 통해 외부로 유통되었으며, 그 유통량은 7,082석이다. 대구의 동문 장시로는 주로 인천염, 부산염, 청국염 등이 공급되었으며, 철송으로 총 4,948석이 공급되었지만 3,028석은 시장에 이입되지 않았다. 동문 장시에 소금을 주로 공급한 역도 부산역(2,925석)과 구포역(975석)으로 철송 염의 78.8%를 공급하였다. 동문 장시도 서문 장시와 같이 외부로의 소금 유통에는 우마, 등짐, 사문진 수운이 이용되었으며, 그 양은 장시에 이입된 1,920석 중 1,051석인 약 54.7%를 차지하였다.

    경상북도에서 소금이 가장 많이 공급된 역은 김천역으로 총 3,065톤이 공급되었다. 김천역은 경부선 철도에서 경북지역의 최북단 역이며, 김천역으로 철송된 소금은 주로 부산, 인천, 주안, 평택에서 공급되었으며, 그 양은 2,980톤으로 97.2%를 차지하였다. 인근 지역의 상주 장시로는 소금 3,500석이 공급되었지만, 이 중 많은 양이 부산과 인천에서 김천보다 남쪽의 왜관역까지 철송을 한 후에 왜관에서 수운을 통해 상주 장시로 소금을 공급하였기 때문에 김천역을 통한 소금 공급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경북선 철도 일부(김천~점촌)가 처음 개통된 시기는 1924년12)이라 1910년 대에는 경북선의 주요 역이 들어선 점촌, 예천, 안동 등으로는 철송이 어려웠다. 또한 김천역은 수운과 연계되지 않은 역이며, 경부선 철도의 최북단의 경북지역 역이기 때문에 김천역으로 공급된 소금은 육운과 멀지 않은 거리의 포구를 통한 수운으로, 향후 도입될 경북선 구간 인근 도시로 상당량 유통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김천역의 인근 장시인 선산 장시로는 40톤, 지례 장시로는 120톤의 소금이 김천역을 통해 공급되었다. 또한 김천 인근의 선산에는 비산, 삽곡, 도미, 해평, 석현 등의 포구가 있었기 때문에 선산 지역 포구들이 김천역 도착염의 유통에 기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대구역 도착 소금의 유통과정을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즉, 대구역 도착 소금의 상당량이 우마, 등짐, 사문진 수운을 통해 타 지역으로 유통된 것과 같이 김천역 도착 소금의 상당량도 동일한 방법으로 염수요가 많은 경상북도의 북부 지역으로 유통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경북선 철도의 1단계 개통(김천~점촌) 기간에만 하더라도 경북선의 소금 유통량은 개통 첫해인 1924년에는 1,017톤이던 것이 1927년에는 7,391톤으로 약 7.3배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1915년에조선하천조사서 (1929, pp.404-405.)의 낙동강 수운 내역을 보면, 경상북도의 낙동강 지류 포구인 풍산, 마전, 낙동 등으로 소금이 수운되어 공급된 기록이 있으며, 달지에서는 소금을 다른 지역으로 수운해서 공급한 기록이 있다. 평수기의 낙동강 가항종점인 달지는 마전과 풍산보다 낙동강 아래쪽에 위치하며, 김천지역 보다도 아래에 위치한 포구로서 달지 공급 소금이 마전과 풍산의 포구로 수운되어 인근 지역인 안동까지도 보급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상주의 낙동진 포구는 갈수기의 낙동강 상류 가항종점이기 때문에 수운에 의한 상주로의 소금 공급은 경부선 철도가 도입된 이후에도 지속되었음을 왜관까지 철송된 소금이 왜관부터는 낙동진까지 수운을 통해서 상주로 소금을 공급하였다는 기록(조선철도연선시장일반, 1912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부선 철송을 통해 가장 소금이 많이 유통된 경상도의 3대 역은 김천역(발송 90톤, 유입 3,065톤), 대구역(발송 75톤, 유입 2,116톤), 왜관역(발송 56톤, 유입 1,676톤)이다. 이 중 수운과 연결된 역은 대구역과 왜관역으로, 이들로의 소금 공급이 많았던 이유는 당시 육로 교통의 불편함을 고려하면 인근 지역과의 수운 편리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김천역은 비록 수운과 바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경부선 철도의 경북지역 최북단 역으로 경상북도 북부 인근 지역으로의 소금 공급을 위해 가장 많이 공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천역으로 운반된 소금은 다시 인근 지역의 포구로 육운된 이후에는 수운을 통해 경상북도 북부 지역(점촌, 예천, 안동)의 인근 포구까지 운반된 이후에 육운을 통해 소비자에게 공급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표 11>의 염운송 자료에서는 재제염의 기록이 분리되지 않았지만, 1934년 기준으로 전국 재제염 생산량의 54.5%를 차지한 경남의 재제염 중 절대 다수량이 부산부 생산의 재제염이란 사실을 기초로 보면, <표 11>의 경부선 철도 운송 소금의 상당수가 재제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철송에 의한 재제염의 경상북도 유통지역도 <표 11>의 유통지역과 유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 함경도 연안 지역

    부산부 재제염은 수운과 철송보다도 해운에 의해 많이 유통되었다. 경상도와 함경도 지역 간의 부산부 재제염 유통의 비율은 3:7로 함경도의 유통 규모가 절대적이었다(부산방면상공업조사, 1911, p.89). 부산부 재제염이 함경도로 해운을 통해 판매된 이유는 과거부터 두 지역 간 해운을 통한 교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1770년 지어진 신경준의도로고에도 우리나라 연안에 대한 해로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27년 완결된임원경제지에 의하면, 관북지방의 명태어 등이 해운을 통해 낙동강 하구로 운송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해로를 이용한 수산물 교역이 재제염 유통에도 이용된 것이다. 부산부 재제염이 많이 거래된 곳은 함경남도의 원산ㆍ함흥과 함경북도의 성진(城津)ㆍ청호진(청진)ㆍ웅기 등13) 이다. 하지만 재제염은 함경도에서도 생산되었다. 함경남도의 재제염 생산지로는 원산, 함흥, 홍원이 있었으며, 함경북도의 재제염 생산지로는 청진과 성진이 있었다. 1934년 기준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의 재제염 생산량은 각각 5,693,000근과 2,349,980근으로 전국 대비 각각 12.4%와 5.1%를 차지하였다(고승제, 1959, p.204;조선전매사제3권, 1936, pp.470-2).

    함경남도 원산이 속하는 덕원부는 청어와 정어리가 함경도에서 가장 많이 산출되었지만 염 생산 기록이 없고 재제염은 생산되었다(田中正敬, 2001, p.86;한국수산지제2집, 1910, p.237). 그리고 함흥군은 소금 생산이 연간 약 4만 근에 달한다(한국수산지제2집, 1910, p.192). 함흥군에서는 동명면(東溟面)의 서호진, 연포면(連浦面)의 신성리ㆍ흥덕리ㆍ용성리ㆍ중흥리, 동주지면(東朱地面)의 호남리ㆍ신형리, 서주지면(西朱地面)의 포흥리에서 함흥군 소금 4만 근이 거의 다 생산되었다. 재제염이 생산된 함흥군의 보청사(甫靑社) 지역은 20세기 초에 홍원군으로 편입되었으며 기존의 자염 생산 기록은 없다. 홍원군에서 제재염이 생산된 곳은 경포사(景浦社)와 신익사(新翼社) 지역이다. 경포사의 송령 지역은 자염 생산지이나 생산량이 많지는 않았다. 신익사의 전진(前津)에는 중국염을 이용한 재제염업자 4호가 있었으며, 어선 80척이 정박할 수 있는 중요 포구였다. 따라서 전진은 어업 근거지로 객주도 12호가 있어서 상업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함흥군의 7개 장시 중에서는 읍성(邑城) 장시가 가장 규모가 크고 소금 등 다양한 물품이 거래되었다(한국수산지제2집, 1910, p.101, pp.179-180). 홍원군에는 4개 장시가 있었으며, 그 중 읍하(邑下) 장시가 가장 크며 소금 등의 거래가 있었다.

    부산부 재제염이 함경남도 지역으로 공급된 이유는 지역 내 생산 자염과 재제염만으로는 소금 공급이 부족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즉, 원산 및 홍원 지역은 어업이 발달하였으나 소금 생산이 부족함으로 원산과 홍원에서 중국염을 통해 재제염도 생산하였지만 자체 소비 및 타지역 공급을 위하여 부산부 재제염을 공급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함흥 지역은 소금 생산이 많아 소금 부족현상은 없었지만 재제염이 자염보다 가격 측면에서 유리하고 인근 내륙 지역의 소금 수요 충족을 위해 부산부 재제염을 공급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함경북도 성진부에는 학성면(鶴城面)의 만춘리 제염장 3곳, 풍호동 제염장 2곳, 예동 제염장 3곳, 이호 염전 2곳 등의 제염시설 기록되어 있지만 학성면으로 소금이 수입된 기록(한국수산지제2집, 1910, p.121, p.126)이 있어서 소금이 부족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성진에서도 재제염을 생산하였지만 부산부 재제염을 공급받았을 것이다. 함경북도 청호진은 20세기 초 부령군(富寧郡) 청하면(靑下面)의 청진(淸津) 지역이다. 1908년 개항된 청호진(청진)은 큰 만이 형성된 지형으로 러일전쟁 당시에 6천 톤급을 비롯하여 36척의 군함이 정박하였다.

    한국수산지제2집(1910, p.85)에 의하면, 당시 청진 인구는 1,218명으로 대부분이 일본인이었으며, 이곳으로 부산과 원산에서 기선이 내항하고, 소금 물산도 풍부하였다. 청호진(청진)이 속한 부령군 기록에는 연천면(連川面)의 시원(柴院)ㆍ기진(基津)ㆍ창진(蒼津)ㆍ포항(浦項), 동면(東面)의 소삼포(小三浦)ㆍ삼일포(三日浦), 삼리면(三里面)의 남랑로동(南浪蘆洞)ㆍ수남(水南)ㆍ삼포동(三浦洞), 청하면(靑下面)의 대서수라(大西水羅)ㆍ소서수라(小西水羅)ㆍ다탄(多灘)에 제염장이 있고, 입빈(入濱)과 양빈(揚濱) 방식으로 제염을 하였다.

    청호진(청진) 지역의 제염관련 가마솥 수는 34개, 종업자는 31명, 1년 생산량은 10만 근 내외이고, 주로 회령(會寧) 및 무산(茂山) 지방으로 유통하였다. 하지만 청호진(청진)은 소금을 다른 지역에서 공급받았다(한국수산지제2집, 1910, p.85, p.179).

    따라서 청호진(청진)에서도 재제염을 생산하였지만 부산부 재제염을 공급받은 것은 함흥군 북쪽 내륙지역의 소금 공급을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즉, 부령군에서는 자체 자염 생산도 많았기 때문에 청호진(청진)에서 물류비를 부담하고 부산부 재제염을 공급받을 이유가 크지 않다. 하지만 함경북도 내륙의 무산, 회령 등은 소금 생산이 안 되기 때문에 외부 소금의 수요가 있었다. 청호진(청진)이 함경북도 내륙지역 소금 공급항이 된 이유는 인근 지역보다 항구가 발달되어 기선 출입이 있었고, 청진-회령, 청진-경성 간의 경편 철도도 있어서 철송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함경북도 웅기는 20세기 초 경흥부(慶興府) 해면(海面) 하송현동(下松峴洞) 지역으로 동해안 최북단 지역이며, 만이 형성된 지형이라 함경도의 항행기선의 종점 지역이었다(한국수산지제2집, 1910, pp.38-9). 따라서 웅기 지역으로는 월 8~10회의 부산(월 1회), 원산(월 3회), 기타 항구(월 2회), 일본 시모노세키(월 1회)간 정기 기선이 있었다. 경흥부에서는 조산만의 굴포(屈浦) 지역에서 소금을 많이 생산하였다14).한국수산지제2집(1910, p.44)에 따르면, 함경북도 경흥부 소금은 질이 좋아서 내륙의 농산물과 교환하였으며, 두만강 연어[鮭] 어업자는 굴포 소금을 쓰기도 하나 일본인이 사용하는 소금은 일본염, 중국 재제염, 대만염, 주안 관염이며, 이 중 가장 많이 쓰는 것은 일본염이고, 다음은 중국 재제염과 대만염이며, 주안 관염은 가장 작았다. 즉, 경흥부에서 소금이 생산되지만 웅기는 소금 생산이 없고 항만이 발달하여 중심 포구 역할을 한 곳이라 이곳으로 부산부 재제염이 많이 보내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함경북도의 성진, 청호진(청진), 웅기는 모두 소금이 생산되는 지역들이며, 성진과 청호진(청진)은 재제염도 생산되었다. 하지만 이들 지역으로 부산부 재제염이 공급되었다는 것은 지역 내 생산 소금이 인근 지역 전체의 소금 수요보다 부족하거나 선호도 문제로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웅기 지역의 일본인 어업자는 일본염을 가지고 가서 소비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일본 자염은 조선 자염보다는 가격이 저렴하지만 재제염보다는 가격이 비쌌다. 즉, 가격이 저렴한 재제염 대신 일본인이 일본염을 사용한 것은 그들의 일본 내지염에 대한 선호에 의한 것일 것이다. 따라서 함경북도 지역으로 부산부 재제염이 많이 공급된 것은 일본인들이 일본염을 수입해서 사용해도 절대적으로 지역 내 염생산 부족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저가의 재제염 수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함경도 지역에서도 부산부 재제염은 포구 객주를 통해 지역의 부상에게 공급되어 소비되었을 것 이다. 이는 전진 포구에 객주 12호가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따라서 염 유통기구 기준의 부산부 재제염의 함경도 지역의 해운 유통 경로는 ‘부산부 재제염 생산자 → 하단 및 구포 염선상 → 포구 염객주 → 염상(부상) → 소비자’로 구성되었을 것이며, 이는 경상도 지역과 동일하다.

    Ⅴ. 결 론

    조선의 전통 자염은 천일염보다 짠맛이 덜 하고 흰 색상으로 인해 조선인의 선호도가 높았다. 하지만 조선 자염은 연료비와 인건비가 많이 소요되어 소금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1885~6년의 자연재해를 계기로 일본염이 수입되었으며, 이를 이어 대만염, 청국염 등도 수입되었다. 일본염은 전오제염을 통한 자염이라 조선염과 큰 차이는 없지만 맛과 기능의 차이로 인해 조선인의 선호도가 낮아서 조선염으로 속여 판매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자연재해로 소실된 염전 복구가 된 이후에도 소금을 계속 수입한 주요 원인은 재제염의 가격경쟁력과 조선의 인구 증가에 따른 소금 수요 증가 현상 때문이다.

    부산으로 처음 수입된 재제염 원료는 대만염이다. 대만염은 천일염으로 자염에 비해 맛이 짜고 색상이 어두워 조선인들이 쉽게 수용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재제염은 전통 자염에서 천일염으로의 소비 이행과정에서 징금다리 역할을 한 가공염이다. 하지만 재제염은 주로 20세기 전반기에 소비된 소금이라 현재는 이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상태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조선의 최초 재제염인 부산 지역 재제염을 대상으로 그 생산과 유통지역을 살펴봄으로써 재제염의 등장배경과 유통과정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재제염 등장 계기를 20세기 초 소금의 수입 통계와 자염의 생산원가 및 재제염의 판매 가격 비교를 통해 살펴보았다. 즉, 개항지별 수입염 통계를 통해 부산항으로의 소금 수입이 많았다는 사실을 통해 부산에서 재제염 가공업이 성행한 근거를 확인하였다. 또한 재제염은 수입 천일염을 재가공한 소금으로 수입 물류비와 추가 가공비용이 소요되었지만, 전통 자염보다 가격 측면에서 유리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도입 초기 재제염에 대한 조선인의 기피 현상이 극복된 이유를 확인하였다.

    재제염 유통은 경상도와 함경도 두 지역이 중심이 되었다. 먼저, 경상도 지역의 재제염 유통은 수운과 철송을 통해 유통되었다. 수운은 전통 자염의 유통경로인 낙동강과 그 지류를 중심으로 한 재제염 유통의 주요 방법이었다. 낙동강 수운을 통한 재제염 유통에서는 낙동강 본류로는 상주 인근 지역까지가 주요 유통 가능지역이었으며, 지류에서는 남지, 창녕, 합천, 밀양 등이 주요 유통 가능지역이었다.

    하지만 경상북도 북부와 동부 지역은 갈수기에 수운이 어려워 남한강을 통한 서해염이나 육운을 통한 동해염이 공급될 수 있어서 부산부 재제염의 수운 유통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어 김천 및 대구 지역까지는 부산부 재제염이 철송을 통해 많이 유통되어 인근 지역으로 재배분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인천의 재제염이 밀양역까지도 유통되어 경상남도의 북부 지역으로는 인천 재제염이 더 많이 유통되는 현상도 발생되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부산부 재제염 유통이 3:7 비율로 경상도보다 함경도 지역이 많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함경도 지역으로의 부산부 재제염 유통이 가능하였던 것은 19세기 이전부터 부산과 함경도 간의 해운 경로가 개발되어 수산물 유통에 이미 활용되고 있었으며, 20세기 전후로는 함경도 지역으로 부산과 일본에서 정기적 기선 운항도 있었기 때문이다. 함경도 지역 중 부산부 재제염의 주요 유통 근거지로는 함경남도의 원산ㆍ함흥ㆍ홍원 등과 함경북도의 성진ㆍ청호진(청진)ㆍ웅기 지역 등이 있다. 이들 지역 중 함경남도의 원산 및 홍원 지역으로 부산부 재제염이 유통된 이유는 이들 지역은 어업이 활발한 지역이라 자체적으로 자염 및 재제염을 생산하였지만, 이것만으로는 지역 내 및 인근 내륙 지역의 소금 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함경북도의 부산부 재제염의 주요 유통 지역인 성진, 청호진(청진), 웅기 지역 역시 동일한 상황이었다. 함경도 지역 내에서도 이들 지역이 부산부 재제염의 주요 유통 근거지가 된 것은 정기선 항로이면서 함경도 내륙 지역과의 교통이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본 연구의 한계점으로는 먼저, 재제염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전체 소금 유통경로와 철도 운송량을 기준으로 재제염의 주요 유통지역과 유통경로를 추적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보다 정확한 부산 지역 재제염의 유통경로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재제염의 유통경로 자료에 대한 추가 발굴이 필요한 상황이다. 또한 재제염 통계자료의 절대적 부족으로 인해 용도별 재제염 소비량을 추적할 수 없었다. 이는 재제염의 용도가 단순히 생활용과 어업용으로만 대별될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소금은 공업용으로도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용도를 기준으로 재제염의 소비량을 알 수 있다면 보다 정확한 부산부 재제염의 생산 원인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Figures

    FBA-56-4-81_F1.jpg
    1885~1894년 부산항의 일본염 수입 추이(단위: 담=100근)
    FBA-56-4-81_F2.jpg
    부산부 재제염 생산량(1908~1939년)

    Tables

    조선의 수입국별 소금 수입 추세
    출처: 1896~1903년은통상휘찬, 45호(1906), 1905~1909년은한국염무개황(1910)(재인용 출처: 류창호, 2020, p.50; 이영학, 1991)
    1885~1910년 간 주요 항구별 수입염 통계

    (단위: 톤)

    주: * 부산항보다 타 항구를 통한 소금 수입이 많았던 연도
    출처:통상휘찬각연도 자료,한국수산지제1집(1908),한국염무개황(1910)(이영학(1991) 자료 수정후 재작성)
    1905년 자염 수지표
    출처:한국염전상황,통상휘찬27호(1905년 목포이사청 보고)
    1907년 자염 수지표

    (단위: 원/100근)

    주: * 판매 이익판매 이익금이 있는 지역
    출처:한국수산지제1집, 1908, pp.576-7.
    청국염을 이용한 부산지역 재제염 수지
    출처:한국수산지제1집, 1908, pp.574-5.
    소금 종류별 수익성 비교

    (단위: 원/100근)

    1912년 부산부의 재제염 생산업체 현황
    출처:부산요람 부록(1912)
    1913~6년 부산부의 제염 생산업체 현황
    출처:부산부세일반
    지역별 재제염 생산량의 비교
    주: + 직전 연도보다 생산량 증가; - 직전 연도보다 생산량 감소
    출처:경상남도 도세일반(1924, 1931, 1936, 1938,경상남도 도세개람(1941
    1934년 각 도별 재제염 생산 현황
    출처:조선전매사제3권, 1936, p.472.
    경부선 역별 염유통 현황(1912년) (단위: 톤)
    출처: 조선철도연선시장일반, 1912, pp.39-70.

    1887~1922년 조선인구 변화

    (단위: 명)

    출처:『일성록』, 1887~1892년;『통감부 제3차 통계연보』, 1910년, p.41;『조선총독부 통계연보』, 제1편, 1922년, p.42.
    <신구 연료비 비교표(단위: 리=1/10전)>
    주: 1개 부옥(釜屋)의 제염고를 연간 50만 근으로 예상하고 구연료(송엽 또는 땔감)와 신연료(석탄)와의 연료비를 지역별로 비교
    출처:『한국수산지』제1집, 1908, pp.596-7.
    출처:『경상남도 도세일반(1922, 1924, 1931)』,『경상남도 도세개람(1941)』
    출처: 조선철도협회,『朝鐵慶北線の槪況』, 1928.12.01.

    References

    1. 경상남도청 (1941), 도세개람.
    2. _________, (1922, 1924, 1931, 1936, 1938), 도세일반.
    3. 고 승제 (1959), 근대한국산업사연구, 대동문화사.
    4. 김 재완 (1999), “19세기말 낙동강유역의 염 유통 연구”, 박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5. 김진백ㆍ장수호ㆍ김철희 (2018), 국가 기록으로 본 조선 500년 수산업 연구 - 수산물 유통과 수산업 조세제도 -, 국립수산과학원.
    6. 김 호종 (1986), “조선후기 어염의 유통실태”, 대구사학, 31(1), 109-138.
    7. 농상공부 수산국 (1908), 한국수산지, 제1집.
    8. ______________ (1910), 한국수산지, 제2집.
    9. 동래부읍지 (1899).
    10. 류 창호 (2020), “한국 근대염업의 네트워크와 그 특성”, 박사학위논문, 인하대학교.
    11. 부 산부 (1917), 부산부세일반.
    12. 비변사등록 제173책, 정조 12년 7월 10일.
    13.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 4, 삼소관음(三所觀音)과 중생사(衆生寺).
    14. 세종실록지리지 150권, 경상도 진주목 김해도호부, 경주부 동래현, 경주부 기장현.
    15. 유 승훈 (2007), “낙동강 하구 제염업의 변천과 소금 관련 민속”, 박사학위논문, 고려대학교.
    16. ______ (2008), 우리나라 제염업과 소금 민속, 민속원.
    17. 이 영학 (1991), “개항기 제염업에 대한 연구”, 한국문화, 12, 535-575.
    18. ______ (2012), “19세기 후반 정부의 염세징수와 그 성격”, 한국학연구, 26, 389-430.
    19. 일 성록 (1887-1892).
    20. 정약전(정문기 역) (2014), 자산어보 - 흑산도의 물고기들, 지식산업사.
    21. 조선철도협회 (1928), 朝鐵慶北線の槪況.
    22. 조선총독부 (1922), 통계연보, 제1편.
    23. _________ (1929), 조선하천조사서.
    24.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1911), 부산방면상공업조사.
    25. 조선총독부 전매국 (1936), 조선전매사, 제3권, 477.
    26. 조선총독부 철도국 (1912), 조선철도연선시장일반.
    27. 탁지부 임시재원조사국 (1910), 한국염무개황.
    28. 탁 지부 (1907), “밀수입염상황조사”, 재무주보, 제36호 부록.
    29. ______ (1910), “釜山港ニ於ケル食鹽ニ關スル調査”, 재무휘보 1.
    30. 통 감부 (1910), 제3차 통계연보.
    31. ______, “報告及統計”, 재무주보, 제3호.
    32. 통감부 재정감사청 (1907), 염업조사, 재무주보, 제15호 부록.
    33. 통상휘집.
    34. 통상휘찬.
    35. 한국정신문화원 (1984), 국역 한국지 - 본문편 -, 574-5.
    36. 釋尾春芿 (1913), 통문관지, 조선군서대계 속 제17집.
    37. 柴田一 (1966), “明治期における食塩市場と塩業界の動向: 國産塩の輸出運動と外塩対策”, 日本塩業の研究, 9, 日本 塩業研究会, 57-58.
    38. 奥田久 (1977), 内陸水路の歴史地理學的研究, 大明堂:東京.
    39. 森田福太郞 編 (1912), 『釜山要覽 附錄』, 釜山商業會議所.
    40. 田中正敬 (2001), 近代朝鮮における鹽業需給と鹽業政策, 一橋大學 博士學位論文.